후리아카후리(강적강) / 한걸음 더, 앞으로.
kurobas/txt 2016. 1. 11. 02:532012년 말에 냈던 후리아카후리(강적강) 책 <한걸음 더, 앞으로>를 공개해 둡니다.
벌써 3년도 꽉 채워 넘겼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D
1.
점심시간의 복도가 소란스러운 것은, 설령 그것이 수험 준비에 들어간 3학년 교실이 있는 층이라 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복도를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며 재잘대며 수다를 떨기에 여념이 없는 여학생들의 목소리, 실내를 운동장 삼아 몸을 움직이는 무리와 그것을 지적하는 교사들의 호령 등이 뒤섞여 왁자한 분위기가 공간을 채운다. 사람에 따라서는 시끄럽다며 불만을 토할 법도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10대의 넘쳐흐르는 활기로 받아들여 줄 법한, 평범한 점심시간의 광경. 그것이 늦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이 시기의 세이린 고교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이 선선했다.
그 시끌벅적한 공간을, 쿠로코 테츠야는 다른 학생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통과하는 중이었다. 손에 든 국어 교과서와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씩 흘끗 쳐다본 쿠로코가 그대로 몇 걸음 더 옮긴 후 발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교실을 알려주는 플레이트를 확인하자, '3-F'라고 쓰인 굵은 문자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속한 B반과 목적지로 삼았던 이 F반 사이의 거리는 분명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의 북적임 탓인지 평소보다 유난히 오래 걸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확인한 바로는, 남은 점심시간은 십여 분 남짓. 괜히 지친듯한 기분에 얼른 볼일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쿠로코는 F반의 뒷문으로 향했다.
문가에 서서 교실 안을 둘러보자 찾고 있던 사람과는 금방 눈이 마주쳤다. 쿠로코가 속한 농구부의 주장인 후리하타 코우키다. 자신을 발견하자 반갑게 웃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오는 그를 보며, 언제봐도 참 사람 좋은 얼굴이네요, 하고 쿠로코는 멍하니 생각했다.
"쿠로코, 교과서 이제 다 쓴거야?"
"네, 덕분에요. 고마웠습니다."
"아니야. 이런걸로 뭘."
오늘, 쿠로코는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와 버린 자신의 교과서 대신 후리하타에게 교과서를 빌렸다. 학교에 도착해서야 가져오지 않은 것을 눈치챈 탓에 다시 가지러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늘 붙어다니다시피 하는 파트너, 카가미 타이가의 얼굴이었지만, 수업시간의 태반을 교과서에 얼굴을 묻고 코를 골던 모습까지 함께 떠올랐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침냄새에 절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후보에서 카가미를 제외하고 나니 다음으로 생각난 것이 후리하타로, 그의 교과서는 쿠로코의 예상대로 별다른 손상이나 오염(?)없이 준수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무사히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교과서를 돌려주며 쿠로코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후리하타는 한 손을 들어 가슴께에서 휘휘 내저었다. 그럴 거 없어. 다음에도 필요하면 빌려줄게. 고개를 든 쿠로코의 앞에는, 예의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후리하타가 있다. 곤란한 듯도, 상냥한 듯도 보이는 그 얼굴을 쿠로코는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리하타와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벌써 3년째 같은 농구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3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기간 동안, 그대로인 것도 있지만 변한 것도 물론 많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변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쿠로코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였다.
우선은 키. 입학 당시에는 쿠로코와 비슷했던 후리하타의 눈높이는, 지금은 그보다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2학년 들어서 다소 늦은 성장기를 맞은 그의 키는 현재 버젓한 170대 후반.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아니어도 단신끼리의 동질감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점은 다소 안타깝지만, 일단은 축하해 줄 일이라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다른 한 가지는, 후리하타 코우키라는 존재를 둘러싼 분위기였다. 잠시만 함께 있어도 알 수 있는 그의 배려심이나 상냥함은 물론 그대로였지만, 지금의 후리하타에게서는 예전, 선배들이 '겁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 시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학년 때의 그가 가끔씩 보이던 불안이며 부담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의 연습과, 1학년이 끝나갈 무렵부터 조금씩 출전하기 시작한 정식 시합 경험을 통해 조금씩 붙은 자신감이 아마도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주장 자리를 넘겨받으면서부터였다. 늘 그들을 든든하게 이끌어주던 존경하는 선배들이 은퇴하면서 건넨, 무게가 느껴지는 직책. 팀을 이끌 4번의 자리를 맡고부터 제대로 발동하기 시작한 그의 책임감은, 그가 원래 지니고 있던 섬세하고 선한 성품과 합쳐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부원들을 꼼꼼히 챙기고, 스스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끌리는 듯 했다. 후리하타는 유하게 보이면서도 공적인 일에서는 똑부러지는 면도 보였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곤란한 듯 웃으면서도 솔선해서 책임을 지고 나섰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도, 부실의 문을 잠그고 돌아가는 길에 크게 기지개를 켜며 '아- 지쳤다-' 라고 하품과 한숨이 섞인 푸념을 날리는 것 외에는 크게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극받는 면이 있는 것인지 부활동 중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서, 학년 초 구경 차 놀러왔던 OB들로부터 '솔직히 이 정도까지 잘 해줄 줄은 몰랐다'는 평도 들은 참이다. 후리하타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부의 후배들 사이에서도 '왠지 모르게 따르고 싶다!'며 은근히 주장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성공적인 리더쉽이었다.
"...저기, 쿠로코?"
"...아."
쿠로코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혼자만의 생각에 조금 오래 빠져있었는지,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어온 후리하타의 얼굴에는 당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미안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고요."
"아, 응. 갑자기 말이 없어져서 좀 당황했어."
"미안해요."
재차 사과하고, 후리하타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교실 벽에 걸린 벽시계를 훔쳐보니 곧 예비종이 칠 시간이었다. 슬슬 교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한 쿠로코가 이제 가봐야겠다는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Bububububu....
어디선가 핸드폰의 진동음이 들려왔다.
"저"
"아, 미안. 잠깐만."
자신은 교실에 핸드폰을 두고 나왔으니, 아마도 울린 것은 후리하타의 교복 주머니에 든 핸드폰인 것 같았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재빨리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쿠로코였지만, 후리하타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의사를 표한 것이 먼저였다. 순간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늦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초조해졌지만 다행히 온 것은 전화가 아니라 메일이었던 듯, 액정을 확인한 후리하타는 간단하게 두서너 자를 입력해 답장을 마치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쿠로코는 보았다. 후리하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는 것을.
그러고 보면 오늘은 금요일이다. 짐작가는 상대가 있었다.
"...아카시 군,인가요?"
"? 응."
아카시. 아카시 세이쥬로. 쿠로코는 자신이 중학시절 속해있던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주장이자, 현 라쿠잔 고교 농구부의 주장,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세이린 농구부 주장의 연인이기도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머리를 감쌌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한 달 정도 전. IH(인터하이)를 준우승이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마무리짓고 잠시 숨을 돌리던 시점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부활동이 끝난 후에 잠시 남아달라던 후리하타. 그리고 전해들은 말이 바로 그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처음 둘의 교제 사실을 전해들은 쿠로코는 일순 정신이 아득했었다. 지금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만, 현실은 이 모양이다. 아카시는 사귀기 전부터도 가끔씩 주말에 도쿄의 본가를 찾을 때면 이렇게 후리하타에게 연락을 한다고 했다.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하하, 덕분에."
간신히 쥐어짜낸 사교성 멘트에 돌아오는 답을 들으며 쿠로코는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후리하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얼추 계산을 해 보니 사귀기로 한 이후로는 실제로 만나는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느슨히 풀어진 그 얼굴을 보니 더더욱 덕분은 무슨 덕분이냐고 토를 달고 싶어졌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그럼 전 이만 갈게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후리하타에게 한 번 등을 보였다가, 쿠로코는 문득 다시 몸을 돌려 후리하타를 불렀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후리하타가 발을 멈추고 자신을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쿠로코는 입을 열었다.
"....무섭지는 않나요?"
"음- 요즘은 그다지."
일순 '무섭다니, 뭐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띄웠던 그가 금세 질문의 뜻을 알아채고 대답했다. 아카시는 그렇게 무섭지 않아. 자신을 향한 후리하타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가, 이내 교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곧 예비종이 울렸다. 이번에야말로 쿠로코 역시 더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걸으면서, 쿠로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불평으로도, 걱정으로도 들리는 그 말은, 교내에 울리는 멜로디와 그에 맞춰 교실로 흩어지는 학생들의 소리에 섞여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후리하타군이 걱정될 뿐이에요.
2.
쿠로코를 보내고 자리로 돌아온 후리하타는 손에 들고 있던, 돌려받은 국어교과서를 책상 서랍 속으로 밀어넣었다. F반의 국어수업은 1교시였다. 아마도 오늘은 더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리에 앉은 그는 대신 곧 시작될 수학 교과서를 찾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밀려오는 졸음을 느끼며 그대로 교과서 위로 엎어져 눈을 감자, 조금 전 헤어진 쿠로코의 모습이 감은 눈꺼풀 안의 어둠 속에 떠올랐다. 교실로 돌아가기 직전, 자신을 불러세운 그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쿠로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무표정하고 감정이 부족해 보이는 그이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실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무신경하지도, 감정의 기복이 없지도 않다. 자신을 보던 쿠로코의 눈은 분명하게 염려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런 반응도 물론 이해는 된다. 어느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은 기적의 세대. 그 중에서도 가장 정상에 있던 것이 지금 자신과 사귀고 있는 아카시였다.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이 있는 쿠로코이니 만큼, 그 나름대로 신경이 쓰이는 점도 많다는 것이겠지. 이해는 하면서도 고마움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끼고 마는 자신에게, 후리하타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너무해, 쿠로코. 아카시와 지금처럼 지낼 수 있게 된 데에는 네 도움이 제일 컸는지도 모르는데. 조금씩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후리하타는 조금 시간이 지난 과거의 일을 더듬었다. 서로에게 지독하리만치 나쁜 인상만을 남겼던 첫 만남 이후로, 아카시와 다시 만나게 되었던 2학년 말의 일을.
# # #
- 아카시 군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후리하타였다. 윈터컵이 끝나고, 그가 차기 주장으로 지목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아카시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은 쿠로코의 눈이 저대로 빠져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로 휘둥그레졌던 것이 기억난다.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아카시 군... 말인가요?' 라고 되묻는 쿠로코를 향해 후리하타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응.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게 많아서."
"왜 아카시 군이죠?"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코의 눈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까지 후리하타가 여러가지를 배워온 상대는, 단연 세이린의 선배들이었다. 농구에 관한 스킬 뿐 아니라, 주장으로서, 선배로서 해야 할 자잘한 일들까지. 휴우가의 뒤를 이어 주장이 된 만큼 그들이 졸업한 후에도 특히 휴우가나 같은 포지션인 이즈키와는 연락이 잦았다. 또, 같은 지구에 속해있고 거리상 왕래하기가 쉬운 슈토쿠의 타카오와도 제법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저 쪽도 1학년 때 부터 기적의 세대의 하나인 미도리마와 함께 슈토쿠의 레귤러를 차지한 인물이다. 실력도 확실한데다 그의 사교적인 성격 덕에 친분을 쌓기가 비교적 쉬웠던 편이다. 그런 그도 후리하타와 비슷한 시기에 슈토쿠의 주장을 맡게 되어, 포지션도 팀에서의 입장도 같아진 둘은 평소에도 종종 만나 의견을 나누거나 함께 놀곤 하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그런 후리하타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쿠로코도 잘 아는 바였고 아마도 그렇기에 더 의아했을 터였다.
"선배들이나 타카오군과의 교류로는 부족합니까?"
"아니, 부족한 건 아니지만... 뭐라고 하면 좋을까."
후리하타는 뺨을 긁적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역시 지금 같은 나이대의 PG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아카시니까."
며칠 전에 다른 학교의 시합 영상들을 쭉 돌려 봤어.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그랬더니, 아무래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더라구. 변명이라도 하듯 이어지는 그의 말을 쿠로코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역시 기적의 세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새삼 놀라게 돼. 듣기론 중학교 때 부터 쭉 주장도 해 오고 있는 모양이고. 그 때 귓가에 울렸던 자신의 목소리에는 수많은 감정이 머물렀다가는 사라졌던 것 같다. 천재에 대한 볼품없는 열등감과 순수한 감탄과 동경과-
"그러니까 한번 이야기나 나눠 보고 싶어."
좀 더 발전하고 싶다는 욕심까지.
사실 뭔가 배우고 싶다는 건 희망사항이고. 그래도 그쯤 되면 보이는 세상도 다를 것 같지 않아? 그런 사람하고 대화하면 분명 더 이렇게, 새로 깨닫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당시의 후리하타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그렇게 덧붙였다. 그래. 사실 나랑 만나 줄 거란 생각도 안 하지만, 그래도.
"...알겠습니다. 반응을 해 줄 지는 모르겠지만요."
"엣"
중간부터는 부탁이라기보다는 넋두리라도 하는듯한 기분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지라, 쿠로코의 목소리에 짐짓 놀랐던 기억이 난다. 대신 저도 죽기는 싫으니까 전화번호는 말고 메일주소만 알려줄게요. 후리하타 군에게 알려줬다고 제 쪽에서도 전해 두겠습니다. 쿠로코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뒤졌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그가 연락처를 검색하는 동안, 후리하타의 가슴은 내내 쿵쾅거렸다. 이유 모를 긴장감에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이윽고 쿠로코가 내민 핸드폰의 작은 액정에는, 아카시 세이쥬로(赤司征十郎)라는 이름 다섯 자와, 그의 메일 주소를 알리는 알파벳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주소로, 후리하타는 그날 저녁 바로 메일을 전송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일단은 간단한 자기소개와 쿠로코에게서 연락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이외에는 아카시의 플레이에 대한 감상과, 혹시 괜찮다면 메일로 농구에 대한 얘기라도 주고받지 않겠냐는 내용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만에 하나라도 긍정적인 답변이 온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이 늦도록 수신함에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고, 후리하타는 '그' 아카시를 상대로 역시 꿈이 너무 컸다며 적당히 체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
아침에 눈을 떠 언제나처럼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던 후리하타는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코 위로 떨어뜨리는 불상사를 겪고 말았다.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창에, 아카시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알겠어> 라는, 짧지만 긍정의 의미를 담은 문장과 함께.
그것이 후리하타와 아카시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 # #
그 날 이후, 후리하타는 종종 아카시에게 메일을 보냈다. 대부분은 농구에 관한 화제였다. 기술에 대한 조언을 구하거나, TV나 인터넷으로 본 국내외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아카시는 의외로 착실하게 답장을 보내 왔다. 처음에는 아카시에게 메일을 보낼 때 존칭을 사용했던 후리하타지만, 몇 번인가 주고받는 도중에 그것도 반말로 바뀌게 되었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말이 짧아져 있었던지라 깨달았을 때엔 철렁했다. 하지만 아카시가 그 점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특별히 기분나빠 보이는 기색도 없었기에 모르는 척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쿠로코에게 전했더니, 쿠로코는 의외라는 얼굴을 하면서도 잘 됐네요, 라고 말해주었다.
오프에서도 만나게 된 것은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었을 때로, 아카시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연습을 하다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지나가듯 한탄을 섞어 메일을 보냈더니, 근시일 내에 본가에 들를 일이 생겨 도쿄에 가게 되니 직접 만나서 봐 주겠다는 답변이 도착했다. 후리하타는 눈을 의심했다. 설마하니 아카시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쿠로코에게 연락처를 물었을 때 부터 속으로 바라던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샌가 자신은 메일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한편으로 감동과도 비슷한 기쁨이 밀려왔다. 그리고, 봐 주겠다고 하면서도 후리하타가 그 날 사정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는 문장의 내용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르쳐 주겠다는데 설마 그 날 다른 일이 있다고는 하지 않겠지,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그 오만함이 아카시답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아카시는 도쿄에 올 일이 있을 때면 후리하타에게 날짜를 알렸다. 주기는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정도였기에 사실상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만난 횟수는 다 합해도 대여섯 번. 하지만 언제나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는 점 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3.
토요일. 후리하타는 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모처럼 농구부의 연습도 없는 주말이다. 집에서 쉬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제, 아카시에게서 연락이 있었으니까.
아카시는 대부분의 경우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아침에 도쿄에 도착해 토요일 점심때가 지나 후리하타를 만났다. 세이린도 주말에 연습이 있는 날이 잦은 만큼, '라쿠잔도 연습이 있을텐데 괜찮은 걸까' 라거나, '피곤하지는 않을까',혹은 '교통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등의 의문과 걱정은 있었지만 묻어두었다. 아카시가 하는 일이다.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을 터였다. 오히려 공연히 참견했다가는 화를 낼지도 몰랐다.
적당히 행거에 걸어 둔 옷 중 몇 가지를 골라 입고 방을 나가려던 후리하타는 문득 전신거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다리에 과하지 않게 붙는 짙은 색의 청바지는 언제나 애용하는 아이템이다. 그 위에는 후드와 점퍼. 평소에도 자주 입는 조합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었다.
탁상 위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고, 입고 있던 상의를 전부 벗어 침대에 던져놓은 후 다시 옷을 골랐다. 후드 안에 입고 있던 흰 면 티셔츠 위로 목 부근이 부드럽게 파여 느슨한 실루엣을 만들고 있는 니트를 덧입었다.
니트의 두께가 그리 두꺼운 것이 아닌지라, 혹시 기온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재킷도 한 벌 팔에 걸치고 현관으로 나왔다. 신발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농구화를 택했다. 사귀기로 한 후로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옷은 평소보다 약간 신경을 썼지만, 아카시를 만났을 때 농구공을 만지지 않고 끝나는 일은 드물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집을 나온 후리하타가 향한 목적지는, 보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는 아니었다. 후리하타의 집에서 전철을 타고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주택가에 가까운 역이다. 두 사람이 언제나 만나고 있는 이 역을 처음 약속 장소로 잡은 것은 아카시였다. 북적거리는 장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그가 제안한 이 역은 주택가의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역 근처라는 특성 때문인지 각종 편의 시설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역의 개찰구를 통과하면 바로 앞에 패밀리 레스토랑이며 작은 까페가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고, 가까운 곳에 작은 공원도 있었다. 공원 안에는 농구 코트가 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몸을 움직여 한 판 붙거나(물론 후리하타가 이긴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다), 아카시가 후리하타를 지도하며 시범을 보이거나 할 때에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는 곳이다.
역에 도착해 핸드폰을 열자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출구 근처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후리하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 # #
아카시가 자신에게 사귀자고 한 것은, IH 결승전을 치르던 날이다.
결승 리그가 시작되고부터 아카시 역시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도쿄에 올라와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만날 기회는 없었다. 각자 연습과 시합이 있었고, 단체 행동이 주가 되는 이상 따로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된 스케쥴에 오히려 평소보다 연락은 뜸해져 있었다. 아카시는 답장은 거르지 않아도 먼저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후리하타가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하게 되니 메일을 주고받는 횟수가 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후리하타의 수신함에 아카시가 보낸 문자가 도착한 것이, 결승전 당일이었다.
올해의 IH 결승은 세이린과 라쿠잔의 대결이었다. 선배들의 졸업 이후 처음 도전한 IH였기에 후리하타의 걱정도 컸지만, 끝을 모르고 성장중인 카가미와 쿠로코 페어의 위력은 역시나 대단했다. 자신들의 아래로 들어온 1, 2학년 중에도 실력이 좋은 선수가 제법 있어 전과는 달리 경기 중 교체가 가능한 선수층이 두터워진 것도 스타팅 멤버가 안심하고 플레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여러모로 생각 외의 선전이었다.
시합 전,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메일을 확인했다. <잘 해 봐.> 라고 써 있는, 격려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메시지였다. 후리하타는 그것을 응원으로 받아들였다.
그 날의 최종 결과는 세이린의 패배였다. 심하다고도, 근소하다고도 할 수 없는 스코어 차로 IH 결승 리그가 끝났다. 역시 결승까지 올라온 이상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웠지만, 전국 2위는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대기실로 돌아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며, 후리하타는 아카시에게 메일을 보냈다. 있다가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라쿠잔이 교토로 돌아가는 것은 내일이라고 들었다. 기왕이면 한 번 정도는 도쿄에 올라와 있는 그를 만나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시합 전후로 스치기는 했지만, 그런 것이 아닌, 그간의 여러가지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겸해서.
같이 시합을 끝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마침 그 쪽도 짐을 챙기는 중이었던지 답변은 예상보다도 빠르게 도착했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시간과 장소가 지정되어 있었다. 정보를 머릿속에 넣고 핸드폰을 닫았다.
결승전도 끝났으니 오늘은 각자 해산하는 것으로 하고 다른 부원들을 먼저 보낸 후 기억해 둔 장소로 나가자, 라쿠잔의 져지를 입은 붉은 머리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카시였다.
"아카시 군!"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눈이 마주친 상대도 손을 들어 맞았다. 방금 전까지 같은 코트에서 승부를 겨루던 상대이다 보니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일단은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우승을 축하하는 말을 건네자 굳이 축하받을 것 까지도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아, 으응. 별 건 아니지만..."
"별 일도 아닌데 날 불렀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느낀 후리하타는 필사적으로 손과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하하...하는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고 있자니 쏟아지는 시선이 매섭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아카시를 향해 말을 이었다.
"에..음.. 그러니까."
"?"
"고,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 그동안 상담에도 응해 주고, 직접 만나서 알려준 것도 많고..."
실제로, 아카시와의 교류는 큰 도움이 되었다. 후리하타가 전혀 시도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술에 접근한다거나 요령을 알려 줄 때면, 과연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의 재능이 있으면서도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 역시 좋은 자극이 되었다. 후리하타는 요 몇 달 새에 자신이 부쩍 성장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아카시의 영향일 것이었다.
"정말 고마워."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리하타의 머리 위로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딱딱한 반응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음성은 부드러웠다. 놀라서 얼굴을 들고 아카시의 얼굴을 보니 그의 표정 역시 부드러웠다. 후리하타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아, 아니야."
그러고 보면, 평소의 아카시는 그렇게까지 날이 서 있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레 차가운 반응을 예상하고 겁을 먹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물론 첫 만남에서 가위를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해 버린 탓이다. 요 근래 연락을 취하게 되면서 알게 된 아카시의 성격은, 그것보다는 훨씬 인간미가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실례되는 반응을 보이고 마는 것 같아 후리하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리하타."
아카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네가 꽤 맘에 드는데."
"으...응?"
갑작스런 아카시의 말에 후리하타는 당황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카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난 의욕이 있고 노력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아. 노력한 만큼 성과를 내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넌 그럭저럭 양쪽을 다 충족하고 있어. 이것저것 가르쳐 준 게 있는 입장으로선 보람도 느꼈다. 게다가 내 말을 거스른 적도 없지. 그래서 난 너한텐 지금까지 제법 상냥하게 대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왜 여전히 그렇게 볼 때마다 반응이 딱딱한지 모르겠군."
"...하하..."
방금 전까지 속으로 생각한 것을 읽은 것 마냥,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부분에 대해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후리하타는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미안."
"...."
후리하타는 결국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대로 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자, 아카시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자니 생각에 잠겨있던 아카시가 입을 연다.
"그렇지. 나와 사귀는 건 어때, 후리하타."
"?"
?
????
?????????????????
"뭐어어!??!??!?!?!??!??!?!?!?!?!?!?"
"역시 이대로는 내가 손해보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나는 나름대로 너에 대한 호감을 표현했는데, 나한테 돌아오는 게 없어서야 진 것 같잖아. 난 지는 건 싫거든. 그러니까 사귀는 걸로 하는 게 좋겠어. 보통 사귀는 사이라고 하면 태도도 좀 더 친밀해지고...흡."
"잠깐잠깐잠깐잠깐잠깐!!!!!!!"
아카시의 폭탄발언에 후리하타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아카시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후리하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의 나열이었지만 아카시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새하얘진 머리로 어떻게든 이 터무니없는 흐름의 이야기를 멈추어 보려 했지만 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허둥대던 후리하타가 양손으로 아카시의 입을 틀어막고서야 정적이 찾아왔다.
"...."
"...."
이게 무슨 짓이지. 아카시의 눈빛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대체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아카시의 서슬에 쭈뼛주뼛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면서도, 후리하타는 작게 항의의 소리를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카시의 말에 토를 단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은 참아선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문제라도?"
"문제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죽더라도 이번만큼은 할 말을 다 하겠다는 심정으로 후리하타가 소리쳤다. 게다가 사귀는 사이면 오히려 더 긴장하는 거 아니야!? 문제는 그 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그런 태클도 걸어보았다.
"그것 참 유감스럽군. 모처럼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안 좋아..."
아카시가 특이한 성격이라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예의 가위 사건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받은 충격만 따지면 가위를 휘두르는 걸 봤을 때 이상일지도 모른다. 쇼크로 다리에 힘이 풀린 후리하타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뭐, 네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게 나쁜 거니까."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으려니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살짝 돌려 쳐다보니 날렵한 옆모습이 시야의 한 켠에 들어왔다. 후리하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지나갔다.
후리하타는 생각했다.
아카시가 한 말에 크게 놀라고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그에게 그런 말까지 하게 한 자신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예전이면 몰라도, 요즘은 다른 사람에게서 겁쟁이라거나, 소심하다는 말을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딱히 나쁜 일을 한 것도 없는 상대에게 겁을 먹는 태도는 확실히 좋은 건 아니다. 트라우마(?)를 안겨 준 아카시가 상대여서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그도 속으로는 약간은 섭섭했을까.
"저기, 아카시 군."
"왜 그러지?"
후리하타는 무릎 위에 얼굴을 괴고 아카시를 불렀다.
"그런데 아까 한 말, 정말 진심이었어?"
"어느 정도는."
그렇구나. 여전히 믿기지는 않지만, 영 농담으로만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너무 질색한 건 아니었는지, 이제와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사실 남자끼리 사귄다는 데에 거부감이 있지는 않았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남자에게 고백을 받은 적도 딱 한 번이기는 해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거절은 했지만, 불쾌감은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준다거나 필요로 해 주는 것에는 약했다. 이번에도 같은 성별에게 고백을 받아서 놀랐던 것은 아니다. 상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카시였던 점에 놀란 것 뿐이었다.
"알겠어."
"?"
"그럼, 조금만 시간을 줘."
이대로 흘려보낼 수도 있었던 일을, 후리하타는 붙잡았다.
조금 전, 사귀자는 말을 꺼내기 전에 생각에 잠겨있던 아카시의 얼굴은 진지했다. 농담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걸 알면서도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넘겨버린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굳이 사귀지 않더라도 앞으로 태도를 고치면 되는 문제라고는 하지만, 기왕이면 그가 열심히 생각해 준 제안에 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달라는 후리하타에게, 아카시는 웃으며 그럼 3일, 이라고 말했다. 짧지 않냐고 했더니 불만이냐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돌아왔다. 얌전히 수긍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헤어지기 전,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핸드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동안 메일 주소만 저장되어 있던 아카시의 이름 아래로 숫자 11자리가 추가되었다.
이틀 뒤, 후리하타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카시의 목소리를 확인한 후리하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라는, 묘하게 딱딱한 문장이었다.
# # #
다시 떠올려보면 정말 황당한 계기로 사귀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사귀기로 하면서도 그렇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 수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소소한 부분에서의 변화는 의외로 금방 찾아왔다.
아카시는 의외로 연애(?)에 협조적이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에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서'군'을 뗄 것을 지시했다. 존대는 메일을 주고받으며 자연히 관두게 되었지만 호칭만은 계속 아카시 군, 이라고 써 왔기에 어색했지만 따르기로 했다. 아카시는 "이름으로 불러도 돼" 라고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역시 그것까지는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 필사적으로 사양해 두었다. 이외에도 어느 날 갑자기 수신함에 도착한 메일 속의 자신의 이름이 '후리하타'에서 '코우키'가 되어 있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냐며 슬쩍 떠 보아도 모르는 척 일관할 뿐이라, 어느샌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아카시'와 '코우키'로 정착되어 버렸다. 그런 것들에 놀라고 당황하는 자신의 반응을 아카시가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언제나 농구에 관련된 이야기만 하던 메일 내용에는 조금씩 일상의 이야기가 섞여들었다. 매일의 날씨며 점심 메뉴, 뉴스에 나온 사건사고며 쇼핑을 다녀온 이야기까지. 하루하루 조금씩 화제의 폭이 넓어져 갔다. 통화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확실히, 전보다 아카시를 대하는 것이 한층 편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전화와 메일을 통해 일어난 변화로, 실제로 만나는 것은 오늘이 그 이후 처음이었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긴장감은 남아있다. 오히려 직접 얼굴을 보면 전보다 어색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후리하타가 그런 생각에 초조해져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후리하타가 주변을 돌아보자, 저 편에서 걸어오는 아카시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기를 기다려 손을 흔들자 아카시가 눈치채고 후리하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어도 아카시가 날카로운 눈으로 빤히 쳐다만 볼 뿐이라 긴장해서 시선을 피할 뻔 했지만, 용기를 내어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였다.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아카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가자, 라며 먼저 발을 내딛은 아카시를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거리를 향해 옮기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4.
역을 나온 두 사람은 카페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여러 곳에 체인점을 두고 있는 브랜드로, 번화가에 있는 점포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 곳은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그다지 시끄럽지는 않았다.
둘이 만나 하는 일은 언제나 비슷했다. 후리하타가 그동안 메일로 보내 왔던 고민이나 질문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 주거나, 머리를 맞대고 같이 의견을 나누거나 하는 일이었다. 연습장을 펴고 적어가면서 설명을 하다가, 실제로 몸을 움직여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를 때에는 근처의 공원에 있는 코트로 향했다. 1 on 1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기는 것은 언제나 아카시였다. 땀을 흘리고 나면 그대로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각자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언제나의 루트였다. 지금도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아 그가 적어 준 메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카시가 보기에, 후리하타는 이해가 빠른 편이었다. 한 번 가르쳐 준 것을 다시 물어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채 넘어가는 것도 아닌 듯, 나중에 확인해 보면 대부분 정확히 습득하고 있었다. 머리가 특별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니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노력만하고 성과가 없으면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후리하타는 실력도 꾸준히 좋아지는 편이었다. 아카시로서도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이었다. 내심 속으로 자신에게 교사의 자질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득, 처음 쿠로코와 후리하타에게서 연락을 받은 날이 생각났다.
# # #
쿠로코로부터 <후리하타 군에게 아카시 군의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마 곧 연락이 갈 거에요.> 라는 메시지가 전송되었을 때, 아카시는 <왜 멋대로 그런 짓을 했지. 그것보다 후리하타라는 건 대체 누구야.>라는 답장을 보냈다. 쿠로코에게서는 <우리 농구부의 새 주장이에요. 아카시군이 카가미 군에게 가위를 휘둘렀을 때 저와 함께 있던 사람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흉흉한 상황 설명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덕분에 기억은 돌아왔다. 평범한 인상에, 쿠로코의 뒤에서 벌벌 떨고 있던 세이린의 선수.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그 겁쟁이가 주장?' 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때의 그는 도저히 주장이 될 그릇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휘둘러진 것도 아닌 가위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어 있던 심약한 부원1, 정도의 인상이었다. 오히려 가위에 베인 카가미 쪽이 태연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주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데에 흔쾌히 ok 할 정도로 흥미가 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연락이 오면 무시하면 되겠지. 그러면 될 일이었다.
그 날 저녁, 후리하타에게서도 메일이 도착했다. 흘낏 보고는 지우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핸드폰의 폴더를 닫았다. 그렇게 방치해 두었던 메시지를, 며칠인가가 지난 어느 날, 수신함을 정리하려다 문득 다시 열어보았다.
후리하타가 쓴 메일은 정중했다.
요즘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려서 메일을 쓰는 사람은 드물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한 문장이었다. 한자의 변환이나 문장 부호까지 꼬박꼬박 지키고 있었다. 내용도 제법 고민을 한 후에 보낸 듯, 전체적인 구성도 매끄러웠다. 이쯤 되면 신선할 정도다. 바로 아래에 여러 통 쌓여 있는, 무라사키바라나 키세로부터 온 메일들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쿠로코나 미도리마의 메일은 단정하기는 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구석이 있는데, 후리하타의 것은 그와는 또 달랐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정돈된 메시지에 아카시는 다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일시적인 변덕일수도 있지만, 아카시는 후리하타에게 뒤늦은 답장을 보냈다. 한동안 상대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그의 노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력은 잘 모르지만 언제나 열심인 것만은 느껴졌다. 세이린의 메인 사령탑은 계속 이즈키가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이 후리하타라는 인물이 플레이 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후리하타는 알고 싶은 것, 익히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다. 더 성장하겠다는 욕심이 잔잔히 전해졌다. 포지션은 자신과 같은 PG라고 했었다. 아, 그래서 나와 대화하고 싶어 했던 건가, 하는 짐작을 어렴풋이 할 수 있었다.
그의 메일에는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는 내용이 없었다. 비문이나 어지러운 이모티콘, 오자 등이 없는데다 주제 역시 농구에 대한 이야기 이외에는 없었다. 진지하고 열심인 사람은 싫지 않다. 아카시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편해지고 싶을 때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에 후리하타의 메일을 열어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문자상으로라고는 하나, 후리하타를 대하는 태도 역시 조금씩 너그러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리하타가 아카시에게 존대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딱히 지적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후리하타의 아카시에 대한 첫 인상은 상당히 험악할 터였다. 그런 그가 존댓말을 그만두었다는 건, 조금은 자신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는 뜻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한 번 실제로 만나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아카시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만나보니, 확실히 자신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처음 보았을 때 정도로 겁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동안 그도 많은 성장을 한 것 같았다. 주제가 농구여서인지 시선을 피하면서도 대화가 막히지도 않았다. 실력도 있었다. 주장이 될 정도니 아주 없지는 않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카시가 짐작한 것 보다도 훨씬 괜찮은 레벨이었다. 배우는 것도 빨랐다.
몇 번 더 만나다 보니, 같은 편이면 더 즐거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시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어느샌가 아카시는 평소에도 후리하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IH를 얼마 남기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음료수를 사서 학교에 놀러온 OB 미부치 레오로부터 "세이쨩, 어쩐지 분위기가 바뀐 거 같은데? 어머 뭐니 얘, 좋아하는 애라도 생겼어?" 라는 말까지 들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일축했지만 아카시는 그 말에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연애감정, 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호감은 넘어선 것 같았다.
IH가 시작되고 나니 후리하타로부터의 연락은 뜸해졌다. 상대도 한 팀의 주장이다. 아카시 역시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늘어났고, 시합과 연습으로 전보다 빠르게 매일이 지나갔다. 저 쪽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해는 하면서도 내심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리그가 시작되어도 다른 학교의 시합 결과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아카시였지만, 올해에는 세이린의 결과에는 눈길을 주었다. 세이린에 카가미와 쿠로코가 있다고는 해도, 그 둘을 제외하면 지금은 졸업하고 없는 선수들이 굳건하게 기둥을 맡고 있던 팀이다. 혹시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무난하게 연승을 거두고 있는 듯 보였다. 다행이었다. 세이린은 고비로 느껴졌던 8강, 4강마저 넘기고 라쿠잔과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 아카시는 후리하타에게 짧은 메일을 보냈다. 세이린과 붙는 것은 기쁘기도, 쓸쓸하기도 했다. 시합 전에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후리하타를 만나고부터 처음 겪는 감정이 많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보낸 그 메시지를 후리하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시합이 진행되는 동안, 후리하타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경기에 지장이 되지 않는 선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플레이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시합 중의 후리하타는 늘 아카시와 만날 때와는 또 달랐다. 곧게 등을 펴고 다른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려가며 공을 쫓는 모습은, 한 팀의 주장이자 사령탑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시합이 끝난 후에는 후리하타에게서 메일이 왔다. 잠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코트에서야 방금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할 기회는 그동안 통 없었던지라 곧 ok를 내렸다. 약속장소에 나타난 그는 인사를 마치자 가장 먼저 라쿠잔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진 것이 분할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미련은 적은 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그 동안 어울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해 왔다. 이런 예의차린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저절로 대응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그런 아카시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그와 만나면서는 딱히 화를 내거나 한 적도 없고, 오히려 늘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아카시가 상냥하게 대할 때마다 놀란 얼굴을 했다. 자업자득이라면 자업자득이지만, 역시 썩 달가운 반응은 아니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귀엽게 보일 때도 있지만, 조금 전 경기 중에 보았던 것 같은 모습도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반쯤 충동적으로, 사귀자는 말을 꺼냈다.
그 소리를 듣고 사색이 되어서 소리를 지르다 급기야 자신의 입까지 막는 후리하타의 모습은, 제법 볼 만한 광경임과 동시에 충격이기도 했다. 예상은 했던 일이다. 아마도 농담이라 치부하고 흘려 넘기겠지. 진지하게 받아준다면 잘 된 일이겠지만, 좀 전의 반응을 보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똑같이 농담으로 넘겨주겠다고 마음먹고 짐짓 네가 계속 딱딱한 태도를 취한 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하지만 진이 빠진 듯 주저앉아 있던 후리하타는 혹시 진심이었냐고 되묻더니, 그렇다면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저도 모르게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면서, 아카시는 3일이라는 시간을 제시했다. 꼭 긍정적인 답이 오지 않더라도 좋았다. 그런 폭탄발언에도 진지하게 반응해주는 점이 더더욱 맘에 들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더니 오히려 어깨의 힘이 빠진듯한 지금의 그의 말투며 태도도 제법 마음 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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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 부탁한다며 전화를 걸어온 주제에, 이후로도 후리하타의 태도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사귀기로 한 것을 빌미로 이름을 부르거나, 호칭을 바꾸도록 강요하거나 하면서 당황하는 모습을 재미도 쏠쏠하기는 했지만 어느것이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자신이었다. 후리하타도 보내오는 메일에 조금씩 개인적인 내용을 섞고는 있지만 그 뿐이다.
사귀기로 한 것도 아직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원거리다 보니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극적인 변화를 바라는 건 무리인지도 모른다. 사귀게 되었다고 해서 닭살 돋는 행각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전과 전혀 바뀐 점이 느껴지지 않는 이 상황이 재미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리하타는,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약간은 행동이 어색하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 생각은 하면서도,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볼 수 없는 상황 때문인지 괜히 불만스러웠다.
"아카시?"
"응?"
"피곤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어온 후리하타는 그런 아카시의 마음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걱정스런 눈을 하고 있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고 있던 것이 피곤해서 멍해진 것 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아니, 라고 대답하자 다행이라는 듯 웃는다.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리하타에게 맞춰 아카시도 입을 열었다. 전보다 주제가 다양해진 덕에, 대화는 그 후로 한동안 길게 이어졌다.
두 사람이 카페에서 나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가는 시각이었다. 오늘은 코트에 들르는 것은 패스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그대로 역에서 헤어지지만, 오늘은 후리하타가 아카시에게 집의 위치를 물었다. 멀지 않으면 데려다 줄까 해서, 라며 멋쩍게 눈을 돌리는 그 모습이 그래도 '사귄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있는 듯 했다. 아카시는 카페에서 가졌던 불만이 약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도쿄에 있는 아카시의 본가는 언제나 만나는 장소로 삼고 있는 이 역에서 한 정거장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위치를 알려주자 후리하타는 "아, 그래서 주변을 잘 알고 있었구나."라는 간단한 감상을 말했다. 전철을 타도 되지만, 걸어가도 2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다. 기왕이니까 같이 걸어서 갈까, 라는 후리하타의 의견에 아카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 옆으로 주택이 늘어선 길은 해가 지고 나니 어둡고 조용했다.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이 한 둘 눈에 띄일 뿐, 인적도 드물었다. 가끔씩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목소리 정도만이 길에 퍼진다.
그렇게 얼마간 걷던 아카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양 옆으로 난 골목 중 한 곳으로 발을 옮기면서 손짓으로 후리하타를 불렀다.
그 곳이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곧 뒤를 쫓아 골목으로 들어온 후리하타를 벽에 밀어붙이고 아카시는 그 입술에 키스를 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당황한 후리하타는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경악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니, 어차피 자주 못 만나니까 진도가 좀 빨라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라고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아카시를 보며, 손등으로 입을 가린 후리하타가 항의의 목소리를 올렸다. 제발 예고 좀 해. 그리고 보통은 손부터 잡는 거 아니야?
인적이 드물다고는 해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작은 소리로 불평을 내뱉는 후리하타를 무시하고, 아카시는 그가 입을 가리고 있는 손을 잡아 내리며 다시 한 번 말을 막듯 입술을 겹쳤다. 그건 내 맘이지. 아카시의 말에 울상을 지었다가도 금세 포기한 듯 눈을 감고 허리를 잡아오는 그의 손을 느끼며, 아카시는 어쩌면 앞날이 그다지 막막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한걸음 더, 앞으로.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