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xt] 10.07 화황의날 / 이렇게, 계속 함께.
kurobas/txt 2012. 10. 7. 23:301007이 화황의 날이 된다데요...?
저는 화황도 황화도 좋아하는데 내년 황화의 날 챙기긴 너무 요원하니까 올해에 용써봄..ㅜ.ㅜ;
오그리토그리 주의 글 백년만에 씀 주의 키세가 지나치게 소녀 주의...( mm)
"고마워요, 카가밋치."
밤 11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욕실 앞에 선 채 머리를 말리던 카가미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실 한 켠을 차지한 크림색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의 반짝이는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완전히 눈에 익어버린, 여러모로 반짝이는 동거인의 색이었다. 키세 료타.
카가미가 키세와 동거를 시작한 지는 올해로 3년째가 된다.
동거라고는 해도 따로 집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혼자 살던 카가미의 맨션에, 대학생이 되어 카나가와에서 도쿄로 돌아온 키세가 들어와 살게 되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어 온 둘에게는 마침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집이었는데다, 카가미의 부모님도 좀처럼 귀국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을 기회삼아 멋대로 결정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혼자 살 때에는 삭막했던 공간도 이제는 두 사람 분의 물건으로 그럭저럭 사람 사는 냄새가 날 정도로 채워져 있었다.
카가미는 다시 수건을 든 손을 움직여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내기 시작했다. '뭐가?'라고 가볍게 질문을 던지자, 난데없이 고맙다는 말을 던져온 상대는 '그냥, 이것저것 다' 라며 빙긋이 웃는다. 긴 속눈썹이 특징적인 눈이 모양 좋게 휘는 그 모습에, 카가미의 입가도 이끌리듯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무슨 일 있었냐, 키세?"
"아뇨. 일이랄 건 없고, 오늘 오랜만에 카이조 때 선배들을 만났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오늘이었나.
카가미는 며칠 전 저녁식사 중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다들 바빠서 못 보고 지내다 이번에 1년만에 겨우 다 같이 모이게 되었다며 키세가 들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키세가 말하는 카이조의 선배들이라면 농구부의 스타멘. 카가미의 기억에도 어느정도 남아있는 얼굴들이다.
"OB모임이라던 그건가."
"응. 그런데 말이죠-"
머리카락이 적당히 마른 것을 확인한 카가미가 임무를 마친 수건을 적당히 세탁 바구니에 던져넣고 거실에 들어와 키세의 옆에 자리를 잡자, 자연스럽게 사이를 좁혀 몸을 붙인 키세가 말을 이어나갔다. 키세는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말하는 것도 어쩐지 평소보다 빠른 듯 느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카가미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선배들이 뭐라고 했게요?"
"뭐랬는데?"
"나 지금 엄청 부드럽고 안정된 분위기라고."
스스로 말해놓고는 쑥스러운지 에헤헤, 하는 어색한 웃음이 따라붙는다.
"뭐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행복해보인다는 말까지 들으니까, 알겠더라구요."
키세는 거기까지 말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끊긴 호흡에 신경이 쓰인 카가미가 옆을 보니,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던 키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맞춰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얼굴 가득히 화사한 미소가 퍼졌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부 카가밋치 덕분이라는 걸요."
"하아..."
이어진 목소리에 카가미는 내심 당황했다. 키세가 한 말의 맥락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원래도 이해력이 좋은 편은 아닌 그다. 어느새 어깨에 기대어 온 키세의 작은 머리통을 곁눈질로 내려다보며, 그저 애매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고민하기를 수 분.
침묵을 깨고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가밋치, 내가 말한 거 하나도 못 알아들었죠?"
"...미안."
"아니에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웃음기를 띈 말소리에 맞춰 카가미의 눈 아래에서 금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키세의 대답에 어쩐지 한층 더 면목이 없어진 카가미는, 가만히 그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빗어넘겨 주며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니, 정말 미안해. 그런데 왜 그게 내 덕이 되는 거야? 그냥 네가 나이 먹으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한 게 아니고?"
하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는 투였다.
"아니에요! 아~ 정말!"
그런 그의 모습에 또다시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린 키세가 급기야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는다. '카가밋치는 바카가미라 어쩔 수 없으니까 친절하게 설명해 줄게요!'라며 볼을 부풀리는 키세였지만, 그 얼굴과 목소리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카가미는 다소 어리둥절하면서 도 '오,오오. 부탁해.' 라고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 - -
"-카가밋치, 나는요."
눈을 가볍게 내리 깐 채, 부드러운 표정으로 키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 전의 발랄한 분위기가 한 풀 가신 조용한 어조였다. 톤이 약간 높은 편인 키세의 목소리가 기분좋게 거실에 퍼졌다. 마주잡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고르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카가밋치를 만나기 전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감정은 전부 일방통행이었다고 생각해요."
카가미는 키세를 바라보았다. 순간 농담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은은한 실내등 빛에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키세는 설명을 해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무언가 말할 수 있을 때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다. 카가미는 그렇게 결론짓고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키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운좋게 얼굴을 잘 타고 나서 중학교때부터 모델 일도 하고, 나름대로 인기도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카가밋치도 알다시피 농구. 그리고 더 어릴 때부터도 분명 인기는 많았다고 생각해요.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로 받아들여 줘요. 뭐 그러니까, 나한테 좋다고 해주는 사람은 늘 있었다는 소리. 하지만 그런 건 그냥 <팬>인 거지, 별 의미는 없었어요. 접근하는 여자애들하고도, 너무 뻔하게 모델 남자친구 한번 사귀어 보려는 게 눈에 보이니까 내가 먼저 선을 긋게 되는 것도 있었고."
키세의 미간에 옅게 주름이 잡혔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쿠로콧치나 아오미넷치...아, 아오미넷치는 좀 다르려나? 하여간 그 둘 좋아한다고 그렇게 쫓아다니면서도, 사실은 진심으로 받아주길 원한 적은 없었던 것 같고요."
뭐, 어차피 아무도 진심으로 받아준 적도 없지만. 요는 제대로 마음을 터놓은 적은 없었단 거에요.
쿠로코와 아오미네.
카가미는 키세의 한숨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고등학교 시절의 존재감 없던 파트너와, 그 파트너의 전 파트너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지나가는 장면은 언제나 시끄럽게 그 주위를 맴돌던 키세의 모습. 허구헌날 짜증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그것도 다, 바라는 게 없었기에 흘려넘길 수 있었던 걸까. 지금 키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니 카가미는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카가밋치는 달랐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이름. 카가미는 감은 눈을 떴다. 잠시 감고 있었을 뿐인데 그 새 불빛이 눈부시게 느껴져 절로 인상이 써졌다. 몇 번 눈을 끔뻑이고 나니, 여전히 남아있는 약간의 눈부심 속에서 키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세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사실 처음엔 나도 당황했다구요. 난 쿠로콧치한테 하는 것처럼 반쯤은 농담으로 카가밋치, 카가밋치 하면서 달라붙었는데 갈수록 카가밋치의 반응이 진지해지니까. 그렇게 반응해 준 사람은 처음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난감하기만 하고. 그런데,"
- 싫지가 않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카가미를 향해 몸을 돌린 키세의 한쪽 손이 카가미의 붉은 머리에 닿았다가, 그대로 스치듯 흘러내려 카가미의 얼굴을 감쌌다. 깨지는 것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상냥한 동작이었다. 그대로 얼굴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키세는, 가볍게 입술이 닿을 뿐인 키스를 하고는 몸을 돌려 카가미에게서 떨어져 다시 앞을 보고 앉았다.
"아니, 오히려 엄청 기뻤어요.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래서 깨달았어요. 아, 나도 사실은 주는 만큼 받고 싶었구나- 하는 그런 거?"
카가밋치가 나한테 되돌려 주는 감정이 너무 기분 좋아서.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알았던 것 같아요. 남이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 그게 얼마나 자신감이 생기는 일인지, 그런 거요. 키세의 목소리는 끊일 줄을 몰랐다.
카가미는 자신이 듣고 있는 이야기가 어딘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기뻤다.
사실 그다지 대단한 일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저 키세의 호의에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라도 답해주지 않으면,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시끄럽다거나 짜증난다고 생각한 적도 분명 있었지만, 매번 매몰차게 내치는 것도 가엾지 않나 하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가장 옆에 있었던 쿠로코가 유난히 키세에게 차가웠기에 더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 키세에겐 저 렇게나 크게 받아들여졌던 건가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스러웠다.
그런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었을지라도, 덕분에 이렇게 지금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카가미는 내심 안도하며 한 손을 키세에게 내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던 키세도, 그 손을 보고는 조용히 웃으며 깍지를 끼워 마주잡았다.
키세는 그대로 카가미의 어깨에 체중을 실어 기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렇게 바뀌어 온 결과물이 오늘 선배들한테 칭찬받은 나라는 거에요."
"아아, 알겠어."
"...그러니까, 고마워요. 카가밋치."
그리고 계속, 함께 있어요.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와, 몸 한 쪽에 느껴지는 체온. 그리고 자신에게 기대어진 몸의 무게를 기분좋게 느끼면서, 카가미는 대답 대신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 키세.